'The Dragon Creek (龍虎溝 용호구)' 은 매우 이상한 지점에 놓여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완성된 1966년, 그리고 개봉이 된 1967년은 쇼 부라더스가 대대적인 transformation 에 들어가던 시점이다. 일단, 일본영화산업이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접어들고,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MP&GI의 수장 록완토가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시점에서 동남아시아+동아시아 시장에서 더이상 신경이 쓰이는 경쟁상대가 없어진 상태 - 따라서 동남아시아에 영화산업의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전환적인 해가 1966년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쇼 부라더스 자사 직배와 계열사의 극장망까지 합해서 이 시점에는 홍콩, 싱가폴, 말레이지아라는 전통적인 쇼 가문의 배급망에서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으로의 확대, 그리고 1963년의 'Love Eterne' (이한상) 의 성공 이후 열린 대만 시장으로의 적극적인 공략작전이 1966년도에 다다르면 어느정도 결실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만 영화감독과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홍콩으로 끌어들여서 합작영화, 혹은 대만시장 공략용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은것은 항상 염원하였지만 진입할 수 없었던 일본시장과, 그리고 1962년의 합작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신필름과의 파트너쉽을 통한 한국시장의 진입인데, 한국의 경우는 직접적인 국내 시장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략을 수정, 로케이션과 배우/감독의 수급을 위한 '극동' 파트너로서만 남기고 일본은 두 가지 목적에서 전략적인 입장을 취한다. 즉, 첫째, 일본의 '남는' 영화인력을 기용하여 현재 연 20편대에 머물고 있고 장르도 제한적인 쇼 부라더스 영화의 제작편수와 장르 다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들 일본 영화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일본시장에 들어간다는 전략이 그것.
이 계획 하에서 당시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있던 츄아 란을 중개인으로 (유학생을 이용해서 연결하는 전략은 1970년대 초반 신필름이 당시 일본에서 조감독으로 있던 문여송 감독을 이용한 방식과 유사하다) 일본의 중견 장르 감독인 이노우에 우메쓰구와 나카히라 고, 타쿠미 후루카와 등 5명과 감독계약을 체결한다. 이 때가 1966년이다. 제일먼저 홍콩 땅을 밟은 이노우에 우메쓰구는 자신의 ㅊ할영감독, 조감독, 작곡가를 데리고 와서 당시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007류의, 혹은 이태리 변종 '본드' 류의 카피캣인 'The Brain Stealer'를 연출하게 된다. 사실 홍콩판 '본드'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싱가폴에서 '싱가폴 버전' 본드영화인 제프리 제인 시리즈를 두 편 성공시키고 홍콩으로 급 스카웃되어 온 로 웨이 ('당산대형'의 그 사람') 가 홍콩의 자넷 린 쭈이와 '젠틀맨' 폴 창 천를 데리고 1년전에 완성한 방콕 올 로케 영화 '골든 부다 The Golden Buddha' 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탄력을 받은 런런 쇼와 레이먼드 챠우는 로 웨이와 당대 홍콩영화계의 여신이었던 제니 후를 연결시켜서 '철관음 Angel with the Iron Fists' 와 그 속편을 1966년과 67년에 완성한다.
이노우에 우메쓰구의 작업속도는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다. 이노우에는 단 한달만에, 그것도 2주의 촬영만에 쳉 페이페이를 데리고 <브레인 스틸러>를 완성하고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영화를 한 편 더 찍고, 그해 겨울 다시 홍콩땅을 밟자마자 두편의 영화를 동시 진행했다. 이 엄청난 스피드에 런런쇼는 감격을 금치 못했고, 현대 액션물을 더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 역시 손 빠르기로 소문난 한국에서 정창화를 영입한다. 당시 정창화는 아세아 영화사 (이지룡)와 옥련공사와의 합작 '순간은 영원히 International Agent X-7'가 1966년 쇼 부라더스의 배급망을 타고 동남아 전역에 배급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던 감독이었다. 정창화는 런런쇼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1968년 겨울에 홍콩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이렇듯 쇼 부러더스는 인접국가들의 장르감독들을 영입해서 자사 영화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대만에서 판 라이를, 일본에서 이노누에 외 4명을, 한국에서 정창화를, 그리고 필리핀에서 2명의 감독을 전속계약자 명단에 포함시키고 1967년부터 본격 가동시키며 기존에 황메이 오페라, 사극, 검객물로 한정되어 있던 라인업을 청춘물, 뮤지컬, 코미디, 첩보/액션물로 다변화한다. 이는 기존에 황메이 오페라 영화를 즐기던 본토 출신+홍콩원주민 관객들이 급속히 고령화되고 전후에 출생한 '본 투비 홍콩어' 들이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영화들을 원하기 시작하는 시점과도 닿는 것이다. 이보다 비교적 체구가 작아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칸토니스 영화사인 Kong Ngee 가 먼지 조세핀 시아오를 내세운 청춘물로 짭잘한 성과를 올리고 시작했으니, 노련한 비즈니스맨인 런런쇼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캐치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런런쇼는 작은 칸토니스 시장 대신, 당연히 거대한 만다린 영화시장에 이 흐름을 끌어들인다. 역시 '대동아적' 비즈니스 감각이다.
<용호구>는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던 쇼 부라더스에서 노장 감독인 악풍 Griffith Yueh Fung 이 당시 가장 신예이고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쳉 페이페이를 데리고 찍은 '홍콩 웨스턴' 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악풍은 쇼 부라더스의 초석을 다진 감독이기도 하고 신필름의 영화 <달기>에서 홍콩쪽 감독을 맡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사극 장르에 강한 감독이다. <용호구>는 노골적으로 웨스턴을 카피한다. 존 포드가 즐겨 사용하던 모뉴번트 밸리의 호라이즌 샷을 흉내내는 것은 귀여움이고, 역마차의 행렬, 중간에 들른 주점에서의 흥겨움과 아가씨들, 장총, 황량한 사막에서의 총격전, 그리고 광활한 대지를 말을 타고 달리며 부르는 '남자들의' 노래. 난데없이 후반에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보안관 (Chief)의 등장. 이 가운데에서 소녀탐정 낸시 드류 (당시 낸시 드류가 큰 인기였고 이 캐릭터를 가지고 온 것이라고 남국전영은 홍보하고 있다) 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는 쳉 페이페이.
스파게티 웨스턴이 아닌 존 포드 웨스턴의 컨벤션을 가지고 와서 20세기 초 중국으로 세팅을 바꾼 후 소녀 탐정 낸시 드류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 와중에 가장으로서 그녀를 지도해 주는 오빠의 존재가 버티고 있고, 플롯을 중심에 놓고 진행하는 <용호구>는쇼 부라더스의 카탈로그 안에서도 이례적인 영화로 읽힌다.
완성도가 높게 빠진 영화는 아니지만 <용호구>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등장한 '만주 웨스턴' 영화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를 하기에 좋은 텍스트로 보인다. 실제로 그 비교가 타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것이, 신상옥의 <마적>과 최경옥의 <여마적>은 모두 쇼 부라더스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영화이고, 이 중에 <여마적>은 'Partisan Lover' 라는 제목으로 쇼의 배급망을 타고 1969년에 개봉되었었기 때문이다. <용호구>에서 <마적>, 그리고 <여마적>으로 이러지는 '아시아 웨스턴' 영화들의 연구는, 이보다 한 디케이드 앞서서 인기를 얻었던 <철새> 시리즈와 반드시 연결지어져 비교영화사의 관점으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홍콩에서 '<철새 Plains Wanderer> 시리즈가 가 쇼 부라더스의 배급망으로 지속적으로 개봉이 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이 영화의 주연인 아키라 고바야시는 이시하라 유지로 이후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일본 남자배우로 등극했었으며, 쇼 부라더스가 가장 벤치마킹 모델로 삼은 것이 니까츠 스튜디오였다는 사실이 이 연구의 유효성을 받펴주는 '팩트' 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용호구>는 그 연구로 가는 게이트웨이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