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요시모토 선생님과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 선생님과 나는 이상하게도 수다코드가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대부분은 어려워하던데..암튼 나한테는 꽤 편한 선생님이다. 암튼 잡 마켓 나가기 전에 과연 퍼블리케이션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선생님 왈, 지금까지 수백개가 넘는 어플리케이션을 봤지만 가장 나쁜 경우는 이미 중요 저널 2-3개에 퍼블리케이션을 했고 그리고 곧 책도 나오는 지원자인데 그 결과물이 별로일경우. 이 경우는 더이상 '희망' 이 없다고 간주되기에 아예 재낀다는군. 그리고 퍼블리케이션이 하나 달랑 있는 경우. 이 경우는 아예 없는것과 '동일하게' 취급한다고 하신다. 따라서...별로인 아티클을 쓰느니 아예 없는 편이 오히려 좋은 점수를 받는다. 다만 이 경우는 논문을 잘 써서 (물론 잡 마켓에 나갈때 완성할 필요는 없고 챕터 3개 정도 갖고 있으면 된다시네) '가능성' 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것이 훨씬 유리하다, 라는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시더라고. 장 젠 선생님은 빨리 아티클 써서 여기저기 보내 보라고 하시고..뭐가 맞는거냐..젠장.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아무생각 말고 논문이나 집중해야 겠다.
연구실을 나오는데 "너가 Five College Fellowship 꼭 탔으면 좋겠다" 라고 하시길래 "선생님이 기가막히게 좋은 추천서를 써 주시면 받게 되지 않을까요?" 라고 이야기하고 나왔다. 웃으시더군 ^^;

by cutetiger | 2008/11/22 18:12 | NYu life | 트랙백 | 덧글(6)

식중독과 월러스틴

식중독을 앓았다. 첫날은 계속 토하고 힘이 없어서 그대로 쓰러져 자고는 이틀째와 삼일째는 계속 죽만 먹었다. 그리고 오늘 조금 나아진 듯 하여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나흘째 계속 이모양이다 보니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 먹었을까..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가장 걸리는 것은...식중독 사태 대략 4시간 전에 먹었던 '아씨' 표 '호이호이' (삼립이 아니다. 미국 자체 한인 브랜드인 아씨의 카피제품이다).가 생각이 난다. 아무래도 그 놈이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는 한인업체 제품은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이 선다.

한 나흘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공부고 뭐고 될리가 없고 영어로 된 게 읽기가 너무 싫더라. 한글 번역본들이 뭐가 있나 하고 찾아보다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이 있길래 그걸 읽었다. 사실 나는 세계체제론의 팬도 아니었고 그리고 그런 거대이론은 체질상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재미있더라. 순식간에 책장이 넘어가길래 역시 번역본인 <근대 세계체제 1권>을 읽고, 영어로 된 버전을 잡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역사적 자본주의 Historical Capitalism> 을 읽는다. 내가 막시스트도 아니고, 막스도 읽은적이 없어서 이해하는 선에서, 즉 학문적 기초체력이 허약하긴 하다만 역시 재미있게 몰입하며 읽고 있다. 월러스틴은, 그의 세계체제론은, 참 달콤하다. 어디에 집어넣어도 착착 들어 맞으니 (적어도 컨쳅추얼한 차원에서는) 그렇게도 많은 학자들이 지난 몇십년간 욹어먹고, 또 공격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읽다보니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내 논문에도 조금 끌고 들어와야 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 맨날 토비 밀러나 말트비 혹은 자넷 와스코만 갖고오기도 좀 지겹고. 이걸 다 읽으면 뒤늦었지만 이 분야 클래식들을 좀 더 읽을까 싶어서 내일은 컨디션이 좀 좋아지면 학교에 가서 사미르 아민이나 지오바니 아리기도 빌려와야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이참에 작년 여름에 읽었던 귄터 프랑크의 <리오리엔트> 역시 다시 책장을 넘겨 봐야지.

그나자나 얼릉 읽어달라고 날 물끄러미 쳐다고보 있는 책들은 잔뜩 쌓였는데...내가 욕심만 너무 많은건지. 세계체제론이 대충 정리되면 읽고싶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은 지 이십일이 지나도록 아직 그 상태 그대로인 아리프 덜릭의 <글로발 모더니티>를 집어들어야 겠다.

by cutetiger | 2008/11/08 03:33 | NYu life | 트랙백 | 덧글(2)

용호구 (The Dragon Creek, 1967)

'The Dragon Creek (龍虎溝 용호구)' 은 매우 이상한 지점에 놓여져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완성된 1966년, 그리고 개봉이 된 1967년은 쇼 부라더스가 대대적인 transformation 에 들어가던 시점이다. 일단, 일본영화산업이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접어들고,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MP&GI의 수장 록완토가 비극적인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시점에서 동남아시아+동아시아 시장에서 더이상 신경이 쓰이는 경쟁상대가 없어진 상태 - 따라서 동남아시아에 영화산업의 절대적인 헤게모니를 쥘 수 있었던 전환적인 해가 1966년이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쇼 부라더스 자사 직배와 계열사의 극장망까지 합해서 이 시점에는 홍콩, 싱가폴, 말레이지아라는 전통적인 쇼 가문의 배급망에서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으로의 확대, 그리고 1963년의 'Love Eterne' (이한상) 의 성공 이후 열린 대만 시장으로의 적극적인 공략작전이 1966년도에 다다르면 어느정도 결실을 맺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만 영화감독과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홍콩으로 끌어들여서 합작영화, 혹은 대만시장 공략용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한 것이 주효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은것은 항상 염원하였지만 진입할 수 없었던 일본시장과, 그리고 1962년의 합작체결 이후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신필름과의 파트너쉽을 통한 한국시장의 진입인데, 한국의 경우는 직접적인 국내 시장의 진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략을 수정, 로케이션과 배우/감독의 수급을 위한 '극동' 파트너로서만 남기고 일본은 두 가지 목적에서 전략적인 입장을 취한다. 즉, 첫째, 일본의 '남는' 영화인력을 기용하여 현재 연 20편대에 머물고 있고 장르도 제한적인 쇼 부라더스 영화의 제작편수와 장르 다변화를 꾀한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들 일본 영화인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일본시장에 들어간다는 전략이 그것.

이 계획 하에서 당시 일본에서 영화공부를 하고 있던 츄아 란을 중개인으로 (유학생을 이용해서 연결하는 전략은 1970년대 초반 신필름이 당시 일본에서 조감독으로 있던 문여송 감독을 이용한 방식과 유사하다) 일본의 중견 장르 감독인 이노우에 우메쓰구와 나카히라 고, 타쿠미 후루카와 등 5명과 감독계약을 체결한다. 이 때가 1966년이다. 제일먼저 홍콩 땅을 밟은 이노우에 우메쓰구는 자신의 ㅊ할영감독, 조감독, 작곡가를 데리고 와서 당시 홍콩은 물론 아시아 전역을 휩쓸었던 007류의, 혹은 이태리 변종 '본드' 류의 카피캣인 'The Brain Stealer'를 연출하게 된다. 사실 홍콩판 '본드' 영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싱가폴에서 '싱가폴 버전' 본드영화인 제프리 제인 시리즈를 두 편 성공시키고 홍콩으로 급 스카웃되어 온 로 웨이 ('당산대형'의 그 사람') 가 홍콩의 자넷 린 쭈이와 '젠틀맨' 폴 창 천를 데리고 1년전에 완성한 방콕 올 로케 영화 '골든 부다 The Golden Buddha' 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성공 이후 탄력을 받은 런런 쇼와 레이먼드 챠우는 로 웨이와 당대 홍콩영화계의 여신이었던 제니 후를 연결시켜서 '철관음 Angel with the Iron Fists' 와 그 속편을 1966년과 67년에 완성한다.

이노우에 우메쓰구의 작업속도는 모두를 질리게 만들었다. 이노우에는 단 한달만에, 그것도 2주의 촬영만에 쳉 페이페이를 데리고 <브레인 스틸러>를 완성하고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영화를 한 편 더 찍고, 그해 겨울 다시 홍콩땅을 밟자마자 두편의 영화를 동시 진행했다. 이 엄청난 스피드에 런런쇼는 감격을 금치 못했고, 현대 액션물을 더 만들고자 하는 욕심에 역시 손 빠르기로 소문난 한국에서 정창화를 영입한다. 당시 정창화는 아세아 영화사 (이지룡)와 옥련공사와의 합작 '순간은 영원히 International Agent X-7'가 1966년 쇼 부라더스의 배급망을 타고 동남아 전역에 배급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던 감독이었다. 정창화는 런런쇼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1968년 겨울에 홍콩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이렇듯 쇼 부러더스는 인접국가들의 장르감독들을 영입해서 자사 영화의 다양성을 확보했다. 대만에서 판 라이를, 일본에서 이노누에 외 4명을, 한국에서 정창화를, 그리고 필리핀에서 2명의 감독을 전속계약자 명단에 포함시키고 1967년부터 본격 가동시키며 기존에 황메이 오페라, 사극, 검객물로 한정되어 있던 라인업을 청춘물, 뮤지컬, 코미디, 첩보/액션물로 다변화한다. 이는 기존에 황메이 오페라 영화를 즐기던 본토 출신+홍콩원주민 관객들이 급속히 고령화되고 전후에 출생한 '본 투비 홍콩어' 들이 성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영화들을 원하기 시작하는 시점과도 닿는 것이다. 이보다 비교적 체구가 작아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던 칸토니스 영화사인 Kong Ngee 가 먼지 조세핀 시아오를 내세운 청춘물로 짭잘한 성과를 올리고 시작했으니, 노련한 비즈니스맨인 런런쇼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캐치하지 못할리가 없었다. 런런쇼는 작은 칸토니스 시장 대신, 당연히 거대한 만다린 영화시장에 이 흐름을 끌어들인다. 역시 '대동아적' 비즈니스 감각이다.

<용호구>는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던 쇼 부라더스에서 노장 감독인 악풍 Griffith Yueh Fung 이 당시 가장 신예이고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쳉 페이페이를 데리고 찍은 '홍콩 웨스턴' 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악풍은 쇼 부라더스의 초석을 다진 감독이기도 하고 신필름의 영화 <달기>에서 홍콩쪽 감독을 맡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사극 장르에 강한 감독이다. <용호구>는 노골적으로 웨스턴을 카피한다. 존 포드가 즐겨 사용하던 모뉴번트 밸리의 호라이즌 샷을 흉내내는 것은 귀여움이고, 역마차의 행렬, 중간에 들른 주점에서의 흥겨움과 아가씨들, 장총, 황량한 사막에서의 총격전, 그리고 광활한 대지를 말을 타고 달리며 부르는 '남자들의' 노래. 난데없이 후반에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보안관 (Chief)의 등장. 이 가운데에서 소녀탐정 낸시 드류 (당시 낸시 드류가 큰 인기였고 이 캐릭터를 가지고 온 것이라고 남국전영은 홍보하고 있다) 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추적하는 쳉 페이페이.
스파게티 웨스턴이 아닌 존 포드 웨스턴의 컨벤션을 가지고 와서 20세기 초 중국으로 세팅을 바꾼 후 소녀 탐정 낸시 드류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이 와중에 가장으로서 그녀를 지도해 주는 오빠의 존재가 버티고 있고, 플롯을 중심에 놓고 진행하는 <용호구>는쇼 부라더스의 카탈로그 안에서도 이례적인 영화로 읽힌다.

완성도가 높게 빠진 영화는 아니지만 <용호구>는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등장한 '만주 웨스턴' 영화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를 하기에 좋은 텍스트로 보인다. 실제로 그 비교가 타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것이, 신상옥의 <마적>과 최경옥의 <여마적>은 모두 쇼 부라더스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영화이고, 이 중에 <여마적>은 'Partisan Lover' 라는 제목으로 쇼의 배급망을 타고 1969년에 개봉되었었기 때문이다. <용호구>에서 <마적>, 그리고 <여마적>으로 이러지는 '아시아 웨스턴' 영화들의 연구는, 이보다 한 디케이드 앞서서 인기를 얻었던 <철새> 시리즈와 반드시 연결지어져 비교영화사의 관점으로 분석되어져야 할 것이다. 홍콩에서 '<철새 Plains Wanderer> 시리즈가 가 쇼 부라더스의 배급망으로 지속적으로 개봉이 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이 영화의 주연인 아키라 고바야시는 이시하라 유지로 이후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일본 남자배우로 등극했었으며, 쇼 부라더스가 가장 벤치마킹 모델로 삼은 것이 니까츠 스튜디오였다는 사실이 이 연구의 유효성을 받펴주는 '팩트' 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용호구>는 그 연구로 가는 게이트웨이가 되어 줄 것이다.

by cutetiger | 2008/11/04 01:11 | my movies | 트랙백 | 덧글(0)

On Johnnie To

한 감독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변화되어가는 스타일과 언어의 문법을 하나 하나 곱씹어가면서 신작들을 챙겨보는 것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을 안겨준다. 나에게는 두기봉이 그럼 감독이 아닐까 싶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이름. 고등학교 때 본 <우견아랑>이나 <대행동> (이건 서극 감독인줄 알고 봤다), <동방삼협>, 그리고 주성치의 <심사관>에 이르기까지 오우삼, 서극, 임영동, 정소동과 같은 A급은 아니었으나 대략 볼만한 홍콩 느와르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그리고 멜로적인 코드를 잘 요리할 줄 아는 감독 정도로 내 머리속에 남아 있던 그 사람. 오우삼, 서극, 임영동이 모두 헐리웃으로 갈 때도 그 대열에 끼지 못하고 '국내용' 혹은 '동아시아용' 감독으로 남아 홍콩을 지킨 이 사람. 그가 평생의 영화동료인 와카파이와 밀키웨이 이미지를 설립했었을 시점에 나는 이미 홍콩영화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후였다. 대학을 들어가고, 내 관심의 권역 안에는 오직 레오 카라와 짐 자무쉬, 그리고 코엔형제만이 존재했었으니까. 그랬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중반은.

두기봉이 다시 나에게 다가온 것은 그로부터도 십수년이 지난 다음이다. 난 두기봉의 영화를, 그가 차곡 차곡 진화를 거듭하고 있던 지난 10년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까. 2년전, 베이징에서 사 온 300여장의 (불법) dvd 들의 목록에서 툭 튀어 나온게 <일렉션> 의 1편과 2편이었다. 뉴욕에서 할일이 없던 여름에 '그냥' 틀었던 <일렉션>은, 고백하건데,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치 대학 들어와서 <택시 드라이버>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과도 맞먹을 만큼. 서른이 훌쩍 넘어서도 영화를 보고 이렇게 놀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사람. 그사람이 바로 두기봉인 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기봉의 '지난 10년'의 영화들을 가능한 대로 다 챙겨봤다. 작년 가을에홍콩에 있을 때는 몽콕과 침사추이, 셩완에 있는 디브이디 가게들을 이잡듯이 뒤져서 12편의 영화를 구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Celestial pictures 에서 쏟아져 나오는 쇼 부라더스 클래식들 사이에서도 <라이프라인>이나 <심사관> 같은 영화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그 영화들역시 내 라이브러리에 채워넣을 수 있었고 말이다.

두기봉의 가장 최근작. 최신작이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는 2007년에 <매드 디텍티브>과 <트라이앵글>에서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더니 2008년에는 <호접비>와 <문작>을 개봉했고, 그리고 현재는 다국적 자본 하에 영어권 배우들(과 주윤발)을 데리고 <레드 서클> 이라는, 장 피에르 멜빌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마치, 그동안 맺힌 한을 풀기라도 하듯 미친듯이 영화를 찍어댄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낼 때 마다 한가지 이상씩의 새로운 방식의 대화법을 고안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던, 그리고 어린 시절 동경하던 영화들의 아우라를 두기봉의 스타일로 영화의 곳곳에 배치하고 내러티브와 협상하고, 그리고 '두기봉 공간'화시킨다. 특히 이런 그만의 시-공간, 즉 '두기봉 월드' 는 <익사일>부터 시작해서 <매드 디텍티브>, 그리고 <트라이앵글>의 에피소드를 거펴 <문작>에 오면서 점점 더 견고해진다. 그는 계속 더욱 고집스러워지는 영화인이 되어가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끊임없이 제거해가고 있다. 내러티브는 더욱 파편화되어 가고 느슨한 연결고리만을 유지하고 있으며 '시간'은 모호해진다. 그의 영화 속에서의 홍콩은 더이상 '지금 그곳'으로서의 홍콩이 아니며, 카메라는 한 작품 한 작품을 지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냉정해지고 대상과 거리를 넒혀간다.

<문작>은 두기봉의 변화에 있어서 <매드 디택티브>와 함께 상징적인 작품으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얼핏 자끄 따띠나 버스터 키튼을 연상시키는 부분적인 단서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감독은 놀랍게도 <쉘브루의 우산>에 영향을 받아 만든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문작>은 영화 전체가 그 자체로 '사라져가는 홍콩'에 대한 알레로리로 읽힌다. 억지로 짜맞추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90분의 런닝타임 전체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말이다. 2008년도 영화임에도 등장인물들은 자전거를 타고, 식당에서 즐겁게 담배를 나누어 피며, 임달화는 소매치기이지만 우아한 취미가 있어서 롤라이 카메라로 흑백사진을 찍는다. 홍콩 섬 센트랄 지역이 주 무대이지만 임달화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야마테이의 한 구석에나 있을법한 낡은 아파트이다. 영화속에서 항상 도망가는, 그리고 정신없이 누군가를 피해 달리고 있는 켈리 린은 - 그 어느때보다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켈리 - <쉘브르의 우산> 속에서 까뜨린느 드뇌브가 입었을 법 한 트렌치 코트에 허리를 단단히 졸라 매고는 홍콩 섬 안의 역사깊은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닌다. 한낮에 숨조차 쉴 수 없이 많은 직장인들이 검은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물빌듯이 쏟아져 나오는 바로 그 센트랄 거리를 켈리 린은 혼자서 부유한다.

두기봉은 자신이 그려내는 이 시대를 알 수 없는 '기억 속의 홍콩'을 추억하고자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이미 사라져 버린 그곳. 그리고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는 그곳을, 중국 본토의 여권을 지니고 탈출하고자 발버둥치는 켈리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작>이, 이제 홍콩을 떠나 서구영화계에서, 가장 뒤늦게 홍콩을 떠나는 코스모폴리탄 예술인으로서의 두기봉이 자신이 사랑한 이 공간, 그리고 자기가 사라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하고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버릴 공간에 대한 애정으로 완성한 영화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오독일까? 하지만 나에게 <문작>은 그런 아련함과 추억, 아쉬움, 그리고 애정이 가득 담긴 두기봉의 작별인사로 읽힌다. 나무나도 사랑스러워 끝나는 시간이 원망스러운, 그런.

by cutetiger | 2008/11/03 09:11 | my movies | 트랙백 | 덧글(0)

뉴욕에 돌아오다

뉴욕에 돌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난 이미 20일 전부터 뉴욕에 있었다.
한국과 홍콩에서의 4개월의 시간을 급히 정리하고 뉴욕에 돌아오자 마자 할 일이 많았다. 일단 13일에 마감이었던 내년 여름학기 수업제안서를 급히 작성하고 - 이놈의 학교에서는 7개월 후에나 시작할 수업의 full syllabus 를 첨부하게 되어 있다 - 그리고 인문대학의 dissertation fellowship 을 위한 프로포절을 작업했다. 이게 사실 가장 이상적인 펠로우쉽이지만, 우리학과의 추천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해서 한 일주일간 우울함에 빠져 지냈다. 지원자 중에서 학과에서 2명을 선발해서 인문대학원 측으로 넘기게 되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시스템. 내 동기 8명 모두가 지원했는데 이 중에서 수영씨와 터키 유학생 Zeynep 이 추천되었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연구를 하는친구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지만 학과의 추천을 받지 못했다는, 즉 학과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나를 한동안이나마 낙담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 5월이면 장학금이 끊기는데 그 이후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불안감이 사정없이 엄습해오기도 했고. 학교가 안되면 외부라도. 이것 저것 열심히 찾다가 멜론 파운데이션에서 주는 InternationalDissertation Research Fellowship (IDRF) 의 프로포절을 시작했다. 이건 11월 5일이 마감인지라 아직도 붙들고 있다. 무슨 프로포절이 11포인트/더블 스페이스로 10장을 내란다. 쓰고, 고치고 또 고치고 있다. 지난 5년간의 수혜자를 보니까 시네마 쪽으로는 단 한 명이더라. 우리학과의 러시아 유학생이 받았다. 에프게니 바우어를 연구하던, 안토니아 란트 제자다. 이 다음에는 12월 1일에 데드라인인 Five Colleges Fellowship 을 지원한다. 메사추세츠에 있는 다섯개의 칼리지 (Amherst, Mount Holyok, Smith 등) 에 방문 대학원생으로 1년간 머물면서 논문을 완성하고, 그리고 한과목의 학부수업을 티칭하는 조건이다. 스타이펜드는 1년간 3만불. 환상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역시 작년 수혜자를 보니 시네마는 한명도 없다 --; 일단 지원은 하겠지만 이리보고 저리봐도 시네마에 돈주는 곳은 참 드물구나 싶다. 이렇게 장학금들을 서치하고 지원하다 보니 인문학에서 시네마를 얼마나 진지한 연구로 인정하지 않는지가 확실히 보인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면 아마도 내년 가을학기부터는 학부 티칭에 목숨을 걸게 되지 않을까 싶다. NYU는 경쟁이 심하니까 운이 좋아서 한과목 가르치게 되면 좋겠지만 일단 인근의 cuny 캠퍼스들과 뉴욕과 그 인근에 널린 college 들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사실 학부티칭은 곧 잡 마켓으로 나가야 할 나같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경력이지만 영어로 한학기에 2과목 이상 수업을 한다는 것은, 나같은 유학생에게는, 논문 쓰지 말라는 것과도 같다. 일주일간 이 두 과목 수업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찰 테니까. 그리고...그 스트레스틑 안봐도...--;
이렇게 지난 20일을 보내고 보니, 유학생활이라는게 참 지긋지긋해진다. 지난 5년간 매일매일이 이런 식이었고..이젠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지금까지 온 시간이 아깝더라. 이제는 가정도 생기고 안정을 찾으면서 차분하게 공부도 하고 싶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게 아닌 것 같다. 특히 나같이 다음달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장학금이 끊어지만 당장 굶어야 하는 가난한 유학생은.

by cutetiger | 2008/11/02 12:30 | NYu lif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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